인권과 민주적 연대성※*1)
― 유가 전통과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 ―
장 은 주 (영산대)
I. 들어가는 글
지금 우리 사회는 여러 가지 수준과 차원에서 유례없는 ‘사회통합’의 위기를 겪고 있다. 예컨대 세대간의 갈등이나 계층간의 갈등은 어느 사회에서나 확인되기 마련이지만, 그러한 갈등들은 그 동안의 압축적 근대화 과정을 겪어 온 우리 사회의 경우 다른 사회들에서는 보기 힘든 강도와 농도를 가지고 문화와 정치와 경제의 전영역에서 그리고 전방위적으로 노출되고 있는 듯 하다. 또 예컨대 파시즘적 근대화 과정의 유물인 ‘지역감정’ 같은 것은 사회 곳곳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 영역에서 거의 광기에 가까운 방식으로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의료계의 폐업사태에서 보듯이 사회의 다양한 이해집단들 간의 수평적 갈등 또한 정상적인 민주적 틀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폭발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우리 사회의 이러한 사회통합의 위기는, 정치-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도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을 앞으로 다가 올 민족의 통일 과정까지 덧붙여 생각해보면, 점 점 더 다중적이고 다층적이며 다차원적으로 되어갈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갈등조정의 양식은 많은 측면에서 그런 위기를 감당하기에는 턱 없이 무력하기만 하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아마도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사회통합의 원리에 대해 우리 사회가 아직도 그 어떤 실천적 힘을 지닌 문화적-정치적 전망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 상황에서 우리가 뭉뚱그려 ‘동아시아 담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 다양한 입론들이 최근 들어 광범위하게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는 듯 하다*1). 우리의 맥락에서만 보자면, 그러한 동아시아 담론의 요점은 그 동안의 우리 현대사의 ‘문화적 식민화’ 과정에서 함께 폐기되어 버린 듯 했던 우리의 공동체주의적 전통의 의미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자유주의적-개인주의적 정치 질서와 그 사회통합적 전망의 문제들과 한계들을 극복할 새로운 대안을 찾자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무비판적인 서구적 정치 가치들의 수용에 기초한 문제 인식이 아니라 좀 더 공동체지향적인 문제인식을 통해 대안적인 동아시아적 문제해결의 전망을 모색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일차적으로는 흔히 일방적으로 서구 추종적으로만 진행되어 왔다고 고발되곤 하는 우리의 선택적 근대화 과정의 모순과 파행성이 그와 같은 동아시아적-유교적 공동체주의의 방향에서 문제해결을 위한 전망을 찾게 동기 지우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색은 다른 한 편으로 서구 자체에서 일어난 서구의 정치 질서와 문화에 대한 자기반성의 다양한 노력들,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의 일정한 맥락을 배경으로 삼아 단순히 방어적인 문화적 자기주장의 수준을 넘어서는 이론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의 모색 시도들 중에는 동아시아적-유교적 공동체주의 전통을 기초로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가치들에 대한 세련된 회의를 정당화하려는, 그래서 우리가 좋은 이유로 그 규범적 지향의 정당성을 의심할 수 있는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론’이나 ‘유교 민주주의론’과 같은 방향에서의 논의들**2)도 있다. 그러나 그런 시도들 중에는 전통적 공동체주의의 한계들을 자유주의적 기본 가치들의 의의를 인정함으로써 보완하고 동시에 우리 전통의 공동체주의에 대한 비판과 재구성을 토대로 서구적-자유주의적 질서에 대한 보완의 전망도 동시에 접합시켜내려는 다양한 방향에서의 이른바 ‘유가적 공동체주의’***3)의 시도들도 있다. 이런 시도들은 말하자면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의 유가적 버전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우리가 우리 사회의, 특히 유가 전통의 강한 공동체주의적 지향을 염두에 둘 때, 그 시도들의 문제의식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문제의 올바른 설정을 위해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그런 ‘유가적 공동체주의’의 시도들과의 생산적인 대화를 염두에 두면서 그 시도들의 민주주의이론적 가능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II.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의 맥락
비서구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서구, 그것도 서구의 문화적 전통의 어떤 정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을 미국에서 서구 정치문화의 중핵이라 할 수 있을 ‘자유주의’ 정치철학에 대한 ‘공동체주의’의 비판이 제기되어 그것이 하나의 세계적인 큰 ‘논쟁’으로 발전하고 또 그런 비판을 하는 ‘공동체주의’가 20세기 말 서구에서 형성된 가장 중요한 정치철학적 사유의 흐름의 하나로 자리 잡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무척 흥미롭고 또 고무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서구의 그 논쟁에서 ‘공동체주의’는 서구 근대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또 다른 종류의 비판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4), 우리의 맥락에서 우선 흥미로운 것은 그 공동체주의가 서구의 자유주의 문화에 대해 그 개인주의적-원자론적 자아관을 비판한다거나 ‘공동체의 상실’이 야기했던 사회해체적 귀결들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비판과 경고는 모두 우리의 전통파괴적, 서구추종적 근대화과정에서 나타났던 동일한 문제들을 반면교사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서구의 공동체주의가 잃어버린, 그러나 부활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가장 핵심적인 정치적 가치들로서 바로 ‘전통’, ‘공동선’, ‘시민의 덕’과 같은 ‘비서구적’으로 보이는 가치들을 강조한다는 사실은 ‘전통의 파괴’로부터 시작된 서구의 계몽주의적-개인주의적 문화 정체성에 대한 서구 내부의 자기반성의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서구의 공동체주의가 서구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해 단순히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어떤 미래진행형으로 공동체주의적 재구성을 시도한다는 사실은 ‘보편성’, ‘합리성’의 이름으로 이해되었던, 그래서 ‘우리’에게도 그 수용이 불가피한 것으로 이해되었던 개인주의적-자유주의적 정치 문화의 위상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할 필요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나아가 상호주관적-공동체적 관계가 고립적 개인에 대해 근원적으로 우선한다는 공동체주의적 논점이 다름 아닌 개인주의적이기만 한 것으로 이해되어 온 서구 문화의 배경 위에서 획득한 설득력은 ‘우리’의 실천적 지향의 공동체주의적-동아시아적 전회의 절실한 필연성과 타당성을 새삼 확인시켜 주는 것처럼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다름 아닌 ‘우리’의 정치문화, 특히 우리의 동아시아적-유교적 정치문화가 서구인들이 한 때 무가치한 것으로 버렸다가 다시 갈구하게 된 ‘공동선’과 ‘조화’와 ‘개인의 억제’ 또는 자기수양과 ‘수신’― 서구의 전통에서는 시민으로서의 ‘덕’으로 이해하는― 등을 강조하는 정치철학적 전통에 깊게 뿌리를 대고 있다는 가능한 자기 확인은 새삼스러울 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현재적인 정치철학적 반성의 방향이 무비판적인 서구지향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전통으로 향하게 해야 할 중요한 이유를 제공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흥분과 기대를 계속 밀고 나가기 전에 먼저 서구의 그 논쟁이 서구의 계몽주의적-자유주의적 정치 문화의 배경 위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해 좀 더 신중한 평가를 내릴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우선 그 논쟁이 다름 아닌 <서구의> 논쟁임을 환기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예컨대 공동체주의의 가장 중요한 대변자 중의 한 사람인 마이클 왈쩌의 다음과 같은 언명은 논쟁의 의미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곳에 있을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개인적 권리들의 언어 ― 자발적 결사, 다원주의, 관용, 분리, 프라이버시, 자유 언론, 재능에 따른 경력 등 등 ―는 간단히 말해서 회피불가능하다. 우리들 중의 누가 그것을 회피하려고 진지하게 시도할 수 있겠는가? 만약 우리가, 〔…〕, (공동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필자) 정말로 상황 속에 있는 자아들이라면, 우리의 상황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러한 언어에 의해 포착된다.”(Walzer 1990, 14) 만약 이렇게 왈쩌가 지적하는 것처럼 공동체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개인의 상황적 규정성이 개인적 권리들에 초점을 둔 자유주의적 정치 문화에 의해서만 제대로 해명될 수 있다면, ‘개인’과 ‘공동체’라는 중심 가치들의 추상적이고 평면적인 대립 설정 속에서 문제를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는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어설 수밖에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적어도 왈쩌의 출발점에서 보면 서구 ― 왈쩌의 경우 미국― 문화의 배경 위에서는 추상적인 개인과 그런 개인에 대해 긴장적 관계를 형성하는 공동체의 대립이라는 것은 삶의 양식의 실천적 측면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둘 때 그 논쟁은 초맥락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에서의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설정을 둘러싼 논쟁이라기보다는 좀 다른 성격의 논쟁, 곧 민주주의적인 서구의 정치 문화 전통의 문화적 자기 이해의 다양한 가능성을 둘러싼 논쟁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 논쟁을 촉발시킨 문화적 맥락은 바로 단선적인 ‘개인’과 ‘공동체’의 대립을 무의미하게 하는 맥락이며, 그런 한에서 자유주의에 대한 공동체주의의 비판에서 진짜 문제가 개인적 권리의 언어를 부정하거나 평가 절하하려는 시도라고 보려는 시각은 초점을 놓칠 수밖에 없다. 거기서의 참된 논점은 오히려 서구 민주주의 문화 전통의 일방적인 개인주의적-자유주의적 자기 이해가 교정될 필요를 확인하자는 것이라고 파악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처음부터 분명히 해야만 하는 것은 서구에서 문제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설정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특히 미국의 역사에서 ‘공동체’는 처음부터 ‘민주주의’와 ‘자유’와의 결합 속에서 이해되었고(참고: Joas 1993) 바로 그 맥락에서 그리고 오늘날의 ‘문화 다원주의’의 맥락에서 좀 더 나은 민주주의의 문제를 위해 공동체주의적 문제제기가 성립했다고 이해해야 한다.
적어도 우리는 테일러나 왈쩌 등의 공동체주의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다른 종류의 반전체주의적 모티브, 곧 차이, 다름, 특수성, 다원주의 등임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참고: Brumlik/Brunkhorst 1993, Vorwort 12)*****5). 그리고 우리는 또한 적어도 이런 공동체주의의 버전들을 자칫 개인의 인권에 한계를 설정하고 그것에 대해 규범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이해된 ‘공동선’이나 집단적으로 구속력 있는 가치지평에 대한 요구의 정당화로 발전할 수도 있는 맥킨타이어(1997)나 샌들(Sandel 1982) 식의 공동체주의의 버전들과 구분할 수는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점은, ‘공동체주의’의 중요한 철학적 논점의 하나는 ‘공동체’가 사회존재론적 차원에서 개인의 정체성에 대해 구성적임을 보여줌으로써 ‘자유주의’ 전통의 원자론적-개인주의적 사회존재론의 오류를 지적하는 데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논점이 그 자체로 개인의 도덕적 가치에 주목하는 말하자면 ‘도덕적 개인주의’까지 거부하는 논점으로 이해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테일러의 표현을 빌자면, 이런 식의 공동체주의에 대한 이해는 “전체주의” 또는 “집단주의”에 대비되어 “변호론적으로” 이해된 “개인주의”를 “존재론적으로” 이해된 “원자주의”로서의 “개인주의”와 혼동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는데(Taylor 1989, 159 아래)*6), 그러한 혼동은 민주주의이론적으로 매우 위험한 결과를 낳는다.
민주주의적인 개인의 자율에 대한 요구는 개인의 정체성이 공동체적으로 구성됨을 부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자기가 태어나면서부터 속하고 있는 공동체적 관계들과 그 안에서의 자신의 역할, 그리고 공동체가 제시하는 선의 이념들과 가치들을 <비판적 거리>를 가지고 평가할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데 대한 요구다. 논점은 각 개인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해 근본적인 차원에서, 그러니까 공동체 자체에의 귀속성의 포기가능성까지를 포함하여, 윤리적 비판을 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소한, 왈쩌의 공동체주의의 한 논점처럼, 그런 윤리적 비판의 <가능성>이 ‘공동체’의 차원에서 공동체적으로 보장되고 문화적으로 용인되고 지지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개인과 개인적 이해관계의 도덕적 가치에 대한 강조는 개인들이 사회적 존재임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실을 개인들이 얼마만큼 자신들의 의지 안에 수용하는가는 개인들 자신이 결정할 문제라는 데 대한 강조일 뿐이며, 그러한 의미의 ‘개인주의’는 초개인적인 국가나 인륜성 자체가 정당성의 근거가 될 수 없게 된 상황, 곧 사회질서에 대한 정당화될 수 없는 전통주의적 정당성 개념이 몰락한 상황의 필연적 산물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참고: Tugendhat 1998, 53). 그리고 이런 ‘개인주의’는 단순히 ‘서구’의 것이라기보다는 ‘모든’ 탈전통적 사회질서의 정당성의 조건 그 자체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유주의에 대한 공동체주의의 비판의 참된 논점은, 얼핏 드는 인상과는 달리, 인권이나 개인의 자율의 이념 등과 같은 자유주의적 기본 가치들 그 자체에 대한 공격에 있지 않다. 오히려 정말 중요한 논점은 그러한 가치들이 개인들의 이해관계의 존중과 보호를 위한 ‘사적 자율’에 규범적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해서 그 가치들이 반드시 개인주의적 사회존재론, 곧 원자주의를 전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나아가 오히려 역설적으로 원자주의적 사회존재론은 그와 같은 사적 자율의 규범적 기반을 위협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 논쟁에서 확인된 것은 사적 자율의 의미 있는 사회적 실현은 바로 그 사적 자율의 상호인정과 존중을 특징으로 하는 공동체적 문화, 곧 민주적인 문화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며, 반대로 단지 민주주의적으로 지향하는 공동선과 공동체적 문화만이 그와 같은 자유주의적 기본 가치들의 사회적 수용과 제도화를 비로소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자유-민주주의’로 귀결된 공동체적 삶의 양식의 문화적 발전 논리에 대한 해명이며, 궁극적으로 그 논쟁은 민주주의적 삶의 양식의 성격에 대한 ‘서구’의 자기 오해의 극복에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논쟁이 ‘우리’에 대해 갖는 의미도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선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그러니까 우리 시민들 각자가 책임 있는 주인으로서 우리의 모듬살이의 틀을 결정해야한다는 민주주의 원칙을 우리가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를 평가하는 문제가 될 것이며, 만약 그 문제에 대한 긍정적 답이 우리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면, 그 다음의 문제는 민주주의 원칙을 실현하는 데서의 단순히 어떤 역사적 우연이나 문화적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 양식을 통해 표현되는 우리의 민주주의적 삶의 양식― 단순히 정부의 조직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의 발전의 맥락에 대한 평가의 문제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전체로서의 우리의 사회적 삶의 양식이 ‘사적 자율의 상호인정과 존중이라는 공동체적 문화’의 형성이라고 요약될 수 있을 민주주의의 문화적 전제의 확보라는 관점에서 어떤 수준에 도달했는지 그리고 그런 전제를 확보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평가하는 것이 정작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렇게 보면 ‘자유주의’도 ‘공동체주의’도 그 자체로는 민주주의적 삶의 양식을 담보할 수 없다는 출발점을 확보할 수 있게 되고, 그런 출발점에서 우리는 자유주의도 공동체주의도 넘어 선 관점에서**7), 예컨대 한 편으로 서구 공동체주의자들의 ‘공동체’에 대한 강조를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그러나,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맥락에 따라서는― 특히 우리 사회와 같이 ‘연줄’과 ‘패거리’의 문화에 익숙한 곳에서는― 개인의 권리와 같은 자유주의적 가치들의 사회적 실현이 더 시급한 실천적 과제라고 아무런 주저 없이 주장할 수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만약 그 자유주의가 자신의 맥락을 형성하는 공동체와 추상적으로 대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에는 그에 대한 일종의 ‘공동체주의적인 교정’(Walzer 1990, 15)이 필요하다고 앞의 태도와 아무런 모순 없이 주장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는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새로운 관점이 마련될 수 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적어도 우리는 ‘서구의 개인주의 대(對) 동아시아의 공동체주의’라는 식의 너무도 억척스러운 선입견의 너머에서 문제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며,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추상적 대립 속에서 그리고 수입과 이식과 적용의 문제로서만 이해되어온 민주주의적 질서와 문화와 삶의 양식의 문제가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다. 요컨대 모든 공동체는 하나의 민주적인 정치공동체가 됨으로써만 개인들의 억압 없는 자기실현의 참된 가능조건이 될 수 있다고 이해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민주적인 정치공동체에서만 ‘개인’과 ‘공동체’의 추상적인 대립이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모든> 공동체적 삶의 양식의 근저에 놓여 있는 원리들의 자기발전 논리의, 그것도 아마도 최고의 표현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민주주의는 단순히 그 역사적 발생 맥락 때문에 ‘서구’의 문화 논리라고 이해될 수 없다. 우리는 문제를 어떤 사회질서가 ‘정당한’ 사회질서인가의 관점에서 접근해야지 ‘문화적 차이’의 관점에서 접근해서는 안 된다. 형이상학과 종교의 권위가 더 이상 타당하지 않게 된 이상, 이제 <‘우리’에게도> “모든 개인들의 이해관계의 평등한 존중”, 곧 인권의 이념만이 유일하게 정당한 사회질서의 원천이 될 수 있다(참고: Tugendhat 1998, 48). 인권과 민주주의는 바로 그런 ‘정당한’ 사회질서의 틀이 되기 위한 전통적 공동체의 자기 변혁, 그 공동체의 ‘도덕적 메타모포시스’(장은주 1999)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인권과 민주주의는 ‘서구’와 ‘동아시아’ 모두의 저 편에서 작동하는, 그러나 어떤 초월적 계기로서가 아니라, 각 문화적 맥락의 삶의 양식의 내적 발전 논리 자체에 함축된, 그러나 비로소 실현되어야 할 그런 ‘역사적 보편성’의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참고: 같은 글).
III. ‘유가적 공동체주의’는 과연 자유주의의 대안인가?
만약 우리의 ‘유가적 공동체주의’에서 내세우고자 하는 ‘공동체주의’가 ‘자유주의’의 사회존재론적 오류를 지적하는 것을 넘어서 더 나아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개인의 ‘선’을 그 보다 규범적으로 더 우선한다고 가정된 그 개인이 속한 공동체의 선을 통해 규정하려는 그런 시도로까지 나아간다면, 그런 공동체주의가 민주주의의 탈전통적 정당성에 대한 요구와 합치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만약 개인이 속한 공동체(들)의 ‘선’(들)과 ‘의무’(들)이 개인에 앞서 ‘전통’으로서 ‘주어져 있고’, 그래서 그것(들)이 궁극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유가적 공동체주의’가 수용하고자 하는 공동체주의의 논점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거부할 충분히 좋은 이유들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도 ‘유가적 공동체주의’는 그 특수주의적 지향만으로도 탈전통적 정당성 개념에 기초한 민주주의적 사회질서가 규범적으로 옹호하고자 하는 ‘다원주의의 사실’(롤즈)과 쉽게 조화하기 힘들다는 것은 분명하다. 민주주의적 사회질서의 “변호론적인” 개인의 자율에 대한 요구는 “인권”과 같이 모든 개인들의 이해관계를 평등하게 존중해야 한다는 이념에서 성립한, 또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 대해 좋은” 규범적 요구들을 넘어 서서 모든 사회 성원들이 의무적으로 수용해야할 특수한 사회통합적 가치지평이나 공동선의 이념을 설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가적 공동체주의’는 기껏해야 민주주의 사회에서 용인되고 고무되고 있는 가치다원주의의 전제 위에서 존재하는, 그래서 다른 가치관들이나 종교 등과 ‘합리적 불일치’(롤즈)의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말하자면 국지적, 부분적 가치지향일 수밖에 없다. 만약 ‘유가적 공동체주의’가 이런 의미의 특수주의적 위상 설정을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그것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8).
물론 공동체주의 자체가 반민주적인 것은 아니다. 만약 ‘유가적 공동체주의’가 또한 민주적 공동체주의가 되고자 한다면, 그 때에는 개인의 억압과 통제를 특징으로 했던 전통적인 <유교>의 공동체주의적 이념(참고: 조경란 2000)이 어떻게 개인의 자율성을 수용하고 개인들의 다양성과 차이와 특수성에 대해 충분히 중립적이고 개방적일 수 있는 그런 ‘공동선’의 이념이 될 수 있을지가 우선 분명해져야한다.
여기서 우리는 ‘유가적 공동체주의’를 권위주의나 연고주의 등과 곧바로 등치시키는 익숙한 선입견을 단순히 반복할 필요는 없다. 이승환 등이 지적한 대로****9), 유교의 공동체주의 이념은 연고주의와 정실주의를 피하려는 ‘상피(相避) 제도’나 군주의 독재를 막으려는 ‘대간(臺諫) 제도’ 및 ‘상소(上疏) 제도’ 등과 아무런 모순 없이 사회적으로 실현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보이는 ‘사욕’을 극복한 바탕 위에서 ‘공선(共善)’과 ‘겸선(兼善)’의 실현을 추구했던 ‘공론 정치’의 이념도 전통적인 ‘유가적 공동체주의’의 건강성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건강성이 그 자체로 곧 ‘민주주의’를 함축하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우리는 이 문제를 유가적인 사회통합의 이념 그 자체를 검토함으로써 접근해 볼 수 있다. 송영배(2000)는 “학문과 도덕계발을 통한 끊임없는 자기인격의 계발과 동시에 주위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관심〔즉 忠과 恕 〕속에서 그들을 지도하고 깨우쳐서, 그들과 더불어 조화로운 안정된 사회”, 곧 “대동(大同)사회”의 이념을 유가적 사회통합의 이념으로 정리하고(19), 그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개개인들의 타산적 이해관계의 고려보다는 오히려 공동체 전체의 화합과 안녕을 이루어내기 위하여, 한편으로 ‘지도자’ 엘리트들의 ‘배움’과 ‘반성적 사유’를 강조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각기 다른 역할을 하면서도, ‘자기’가 관계하고 있는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게 각별한 ‘배려’(恕)를 강조하는 유교의 덕의 윤리는 결국 개인을 공동체 안에서의 자기가 실현해 내야 할 역할을 통해서 규정해내는 일종의 유기체론적 세계관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에 틀림없다.”(같은 곳) 때문에 그에 따르면 유가적 공동체주의에 대한 의미 있는 비판은 가족 중심주의나 권위주의 등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런 유교적 세계관이 갖고 있는 도덕형이상학의 유기체론적인 특성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참고: 같은 곳).*****10) 그러나 과연 이 유가적 대동사회의 이념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적 공동체의 이념이 될 수 있는가?
‘유가적 공동체주의’는 “하나의 유기체적인 공동체 안에서의 ‘공공의 선’을 실현해 내기 위하여, 언제나 개인적인 ‘사심’의 극복을 말하는 ‘덕’의 윤리”(송영배 2000, 28-9)에 대한 평가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덕은 “언제나 자기 심리 안에서 한편 ‘저급한 욕구’를 따르려는 자기의 ‘사적’인 의지(즉 人心)와 ‘공공선’을 추구하려는 ‘고급 의지’(즉 道心) 사이의 갈등과 간극을 없애려는 정신적ㆍ도덕적 해방”(같은 글, 29)에 기초한다. 그러나 만약 이런 식으로 ‘공동체’의 논리가 이해된다면, 그러한 논리는 많은 경우 ‘개인’이라는 도덕적 가치와 필연적으로 갈등할 수밖에 없을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공공선’이 무엇인지 자명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모든 개인에게 똑 같은 방식으로 인식되는 것으로 전제될 수 없는 그런 경우에도, 그것이 어떤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것으로 전제되면서 그리고 그것이 공동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주장되면서 그것의 논리가 연대성의 논리에 따라 개인에게 공동체의 이름으로 강요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는 다름 아닌 서구의 자유주의가 정당한 이유 때문에 극복하고자 했던 방식의 ― 예를 들어 자코뱅주의 식의 공화주의에서 나타났던 ― 전형적인 정치적인 ‘덕’의 논리다.
더구나 만약 과거 유교 사회에서처럼 몇 몇 관료적 지식인들이, 그리고 단지 그들만이 정신적ㆍ도덕적 해방에 이른 것으로 또는 이를 수 있는 것으로 상정되는 한, 그런 해방의 논리는 그에 이르지 못한 ‘저급한’ 수준의 개인들에 대한 억압의 논리가 될 수밖에 없다. 어쨌든 공공선이 실현되어야 한다면 ‘인심’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공공선을 인식할 수 있는 그 보다 ‘고급’한 것으로 이해된 ‘도심’에 이른 사람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런 ‘공동선’의 논리는 필연적으로 ‘완성주의(perfectionism)’와 엘리트주의적 ‘간섭주의(paternalism)’로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유가적 공동체주의’가 오늘날의 조건에서도 전통적 사회질서의 모델을 그대로 고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것이다. ‘공공선’은 무엇이고 어떻게 확인되는가? 누가 도덕적 완성을 평가할 것인가? 이런 문제들에 대한 답은 유교 이념 자체 안에서도 결코 자명하지 않을 것이지만*11), 우리가 ‘탈형이상학적인’ 오늘날의 조건에서 성리학적 형이상학의 틀을 사회의 모든 성원들에 대해 구속력 있는 토대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한 더 더욱 불투명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논점은 ‘개인의 해방’이라는 전제 위에서는 ‘공동체’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어떻게 근대적 개인의 해방이라는 역사적 성과를 무시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유가적 공동체주의’는 그러기 위한 개념적,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가적 공동체주의’는 그 의도에서는 그 자체로 반민주적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보장을 요구하는 자유주의의 강한 요구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송영배 2000, 27)”의 문제에 대하여 추상적 선언을 넘어서 아무런 체계적인 대답을 제시해 주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답은 분명하다. 송영배 자신의 지적처럼, “모든 인간의 평등한 권리와 자유가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투명한 민주주의적 제도가 실현되어야 한다.”(29) 그러나 이런 민주주의는 ‘유가적 공동체주의’에 함축될 수밖에 없을 것처럼 보이는 완성주의와 간섭주의의 논리 그 자체를 배제하는 것은 아닌가?
이진우(1999)는 아마도 이런 문제를 잘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덕’을 깨치는 일(명덕明德)을 공동체, 더구나 이기적 욕구의 다양성과 이해관계의 충돌을 전제한 위에서의 공동체의 맥락 안에서의 ‘중리(衆理)’의 문제로 파악하고, 이를 칸트의 “이성의 공공적 사용”과 연결시켜 해명하려고 함으로써 그런 문제를 피해가려 한다. 그에 따르면 “중리는 타인과의 관계와 의사소통을 통해 자신의 이기심을 제어하고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덕성을 획득하는 이성적 능력이다. 중리는 간단히 말해 공공적 이성인 것이다.”(같은 글, 317-8) 이렇게 되면, ‘공공선’은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배분적 정의에 관한 합리적 기준”에 따라, 그리고 “이 기준에 관해 사회적으로 정당한 동의”에 따라 평가될 수 있을 것이고(318), 따라서 유가적인 ‘덕의 윤리’는 단순히 “도덕적 덕성은 타인의 동의를 구하기 위한 의사소통적 관계에서만 습득될 수 있다”(같은 곳)는 데 대한 주장 이상의 것을 의미하지 않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완성주의’와 ‘간섭주의’의 문제는 해소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선 칸트가 말하는 ‘이성의 공적 사용’은 단순히 ‘중리’라기보다는 말하자면 ‘비판적 중리’다. 여기서는 자율적 개인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관계에 대한 의무나 자신의 역할과 위치 그리고 자신의 주관적인 가치관을 넘어서 ‘보편적’ 관점에 서는 것, 단순히 공동체적일 뿐만 아니라 말하자면 ‘탈전통적인’ 공동체의 관점에 서는 것이 문제다. 이것은 “특정한 관계와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그래서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에 의해 구체적으로 공유되는” 가치와 규범으로서의 “덕”(이진우 1999, 320)의 관점에서 서는 것**12), 곧 ‘명덕’의 논리와는 명백히 다른 것이다.
아니, ‘이성의 공적 사용’은 ‘덕’의 논리를 배제한다고 해야 옳다. 그래서 칸트는 민주주의적 ‘공화국’이 공공선의 지향이라는 덕을 함양한 시민들, 곧 ‘천사들’이 아니라 ‘좋은 조직’을 통해 유지되어야 한다고 보았다(Kant 영구평화론, 223 아래). 다시 말해 칸트는 문제를 시민의 덕이 아니라 제도적 절차를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공화국의 제도를, 아무리 이기적인 개인들 사이에서라도, 그들의 이기적인 지향이 서로 서로 맞물려 상쇄효과를 일으켜 결국 그 파괴적인 효과가 무화되게끔 조직화해서, 시민들이 비록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들’은 아니더라도 ‘좋은 시민들’이 되도록 강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같은 글, 224). 그래서 그에 따르면 민주적인 법치공화국은 ‘악마들로 이루어진 인민들’ 사이에서도 가능하다. ‘이성의 공적 사용’은 “덕치”와 대립되는 “절차주의”의 방향에 서 있는 것이다.
나는 인간 사회의 가치와 규범이 역사, 공동체, 다른 인간의 행위 및 사유로부터 독립된 고유의 영역을 가진 것이 아니며, 언제나 전반성적인 관습이나 습관, 곧 공동체적 맥락과 함께 고찰되어야만 한다는 이진우의 헤겔주의적 논점 자체를 반대할 생각은 없다***13). 그러나 칸트가 ‘인권’과 ‘민주적 절차’로 해결하려 했던 문제를 시민의 ‘덕’과 시민들 사이의 ‘상호주관적 신뢰’(이진우 1999, 321)로 해결하려 하면서 칸트를 끌어들이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두 해결책은 <적절한 매개의 과정이 없다면> 명백히 대립적인 방향을 지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진우가 이해하는 것처럼 유가적 덕성이 “특정한 관계를 관계로 구성하는 한계 개념일 뿐만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권리 추구를 멈추어야 하는 한계”인 것이라면, 더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칸트에게 ‘이성의 공적 사용’의 전제이자 결과인 개인의 자율과 인권은 ‘중리’의 요구로서도, 특정하고 구체적인 공동체 성원들의 ‘다수결의 원칙’으로서도 침해될 수 없는, 말하자면 ‘공동체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인권’은 공동체적 덕의 논리에 의해 한계 지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모든 사람의 이해관계의 평등한 존중’의 관점에서, 그러니까 ‘인권’의 관점에서만 제한될 수 있을 것이다****14). 이진우 자신도 분명히 의식하고 있지만*****15), 이런 사회통합의 기제로서의 인권의 이념은 시민들 상호간의 신뢰에 대한 요구와는 다른 방향에서 문제를 보고 있다.
물론 단순히 칸트가 옳고 ‘덕의 윤리’는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덕의 윤리’가 특정한 공동체의 반성되지 않은 문화적 자기이해의 표현일 수도 있는 ‘공공선’의 논리를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좋은 삶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강제적 덕목으로 요구할 위험과 마찬가지로, 헤겔이 지적한 것처럼(참고: Hegel, 법철학, §29), 칸트의 절차주의는 개인들에게 ‘내재적으로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외적이고 형식적인 보편자’로서 단지 그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으로서만 작용할 위험도 있다*16). 문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것이라기보다는 개인들 사이의 관계가 반공동체적인 무질서로 귀결되지 않고 공동의 삶을 위한 조화로운 관계를 낳을 수 있어야 한다는 데 대한 정당한 요구가 욕구와 필요와 이해관계의 다양성과 그것들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주관적 자유’의 존중에 대한 마찬가지로 정당한 요구와 어떻게 적절하게 결합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유가적 공동체주의’는 아직 이 문제에 대해 충분한 답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IV. 인권과 공동체적 연대성
우리가 이런 문제에 제대로 접근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자유주의냐 공동체주의냐’의 문제를 적절한 방식으로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주관적 권리는 바로 그 권리의 상호인정과 존중을 특징으로 하는 공동체적 문화의 맥락 안에서만 실현 가능하며, 거꾸로 단지 처음부터 그런 권리의 가치를 전제하는 민주적인 공동체의 문화만이 그런 권리의 사회적 실현을 가능하게 한다는 인식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서구의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을 통해 배워야 할 핵심 논점일 것이다.
‘공동체’는 떠날 수 없는 출발점이다. 공동체는 모든 개인들의 정체성과 자기 존중의 토대다. 문제는 이 공동체가 어떻게 그 성원인 모든 개인들에게 억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또는 의미 있는 자기실현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 역시 포기할 수 없는 출발점인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개인의 논리’와 ‘공동체의 논리’가 똑 같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진짜 문제는 그 대립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적 삶의 양식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다.
송영배는 묻는다: “개개인들의 경쟁적 관계에서 ―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 방어적인 자유주의적인 개인주의의 실현이 우리의 동아시아의 유교적 전통을 지닌 국가들이 여전히 전력을 쏟아서 추구해 나가야 할 아직도 유효한 ‘근대화-현대화’의 길인가? 아니면 우리들의 의식 속에 관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유교적 윤리론의 비판적 계승이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새로운 대안의 길인가?”(송영배 2000, 29) 그러나 이런 양자택일은 불가능하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서구에 대해서도 잘못된 문화적 자기이해이고 그래서 ‘공동체주의적 교정’이 불가피했던 것이며, 반면에 ‘우리의 동아시아의 유교적 전통’은 바로 그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방향에서의 교정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교정들의 잣대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도 ‘유가적 공동체주의’도 아닌, 그리고 단순히 ‘서구’의 것도 ‘우리’의 것도 아닌, 바로 모든 인간 공동체가 그 공동체 성원들의 왜곡되지 않고 상처받지 않는 자기존중과 자기실현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발전시킬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적 삶의 양식이다.
여기서 유교가 ‘우리’의 의식 속에 관습적으로 존재하고 있고, 그래서 그 비판적 계승이 당연한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지적은 옳다. 그러나 이런 출발점은 우리의 사유가, 하나의 실천으로서, 언제나 구체적인 출발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실천적, 실행적pragmatic 필연성을 표현하는 것이어야지 동양 문화의 어떤 나르시시즘의 표현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그 ‘비판적 계승’의 문제는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민주주의적 삶의 양식을 발전시킨다는 관점에서의 문제이지 ‘유교’의 관점에서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가 유교에 대해 우선한다. 그것은 유교의 배제가 무조건 바람직하다는 것이 아니라 유교라는 오랫동안 우리의 역사적 삶의 양식을 규정해 왔던 문화적 원천을 어떻게 이용하고 재구성할 것인가는 결국 우리 성원들의 민주주의적 참여와 토론과 의견 및 의지형성의 과정에 달려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설사 우리가 우리 전통의, 특히 유교에 의해 각인된 강한 공동체적 전통에서 출발한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귀결은 불가피하다. 우리는 여기서 처음부터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냐 유가적 공동체주의냐?’를 물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이 전통적인 공동체적 관계가 그 성원들 모두에게 가치 있는 자기실현의 상호주관적 토대가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물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그 어떤 공동체적 연대성의 관점에 서더라도, 그것이 도대체 정당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인권’과 같은 개인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장치를 필연적으로 요구할 수밖에 없음을 확인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바로 그 바탕 위에서 ‘유교 공동체’의 성격 변화를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한 ‘공동체’에서 ‘인권’의 인정이 의미하는 것은 그 공동체를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구조적으로 개방적인 공동체로 만든다는 것을 함축한다(아래의 논의는 참고: Wingert 1998, 35 아래). 우선 인권은 그 공동체가 그 성원들이 단순히 같은 공동체의 성원일 뿐만 아니라 또한 불가피하게 낯선 개인들이기도 하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한 공동체가 인권을 수용한다는 것은, 그 공동체의 성원들이 지닌 권리와 의무는 그 성원들이 같은 공동체에 속한다는 단순한 그 사실보다는 무한히 다양한 차원에서 일어나는 또 때로는 좁은 국지적 경계를 뛰어 넘는 성원들 상호간의 관계의 상호성과 공평성에 의해 규정되어야 함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인권은 공동체를 내적으로 개방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인권은 또한 그 공동체를 외적으로도 개방시킨다. 인권은 성원의 경계에 대한 폐쇄적 확정을 배제하게 하는 효과도 지니고 있다. 어떤 이가 파키스탄 국적을 가지고 있다고, 그가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살고 ‘우리’를 위해 일하고 ‘우리’ 중의 누군가와 결혼까지 했는데도,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다며 배척하지 못하게 한다. 바로 이 인권을 인정함으로 해서 공동체적 ‘우리’는 스스로를 도전 받을 수 있는 심급으로 내세우는 그런 ‘우리’가 된다. 인권이 공동체적 연대성에 대해 갖는 일종의 ‘검사기’로서의 역할(같은 글, 36)은 연대성의 원리에 대해 그 가능한 자기폐쇄의 논리를 멈추게 강제하는 것이다.
‘인권’의 개인주의는 ‘공동체적 연대성’의 반정립물이나 대립물이 아니다. 다만 ‘인권’은 그 ‘공동체적 연대성’이 가서는 안 되는 길, ‘공동체’가 도대체 그 구성원들에게 왜곡되지 않은 자기실현의 조건이 될 수 있기 위한 전제가 무엇인지를 소극적으로 한계 지울 뿐이다. 그러니까 인권은, 개인들 사이의 다양성과 차이와 특수성이 존중되어야 하는 근대적 삶의 조건에서,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규범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수용될 수 있는 최소한의 소극적 조건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런 공동체는 내적으로는 <최소한> 그 성원들의 자유로운 가입과 탈퇴를 보장해야 하고, 그 성원들에게 공동체의 이름으로 물리적인 강제나 심리적인 압박을 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Honneth 1993, 265). 그리고 그런 공동체는 외적으로는 <최소한> ‘우리’가 우리와는 다른 ‘그들’과 대립된다는 그 이유만으로 ‘우리’의 ‘우리임’을 확인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권의 개인주의는 모든 ‘우리’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부정적 우리>하고만 배타적이다(Wingert 1998, 40). 한 마디로 말해서 ‘인권’은 오늘날의 조건에서 규범적으로 타당한 공동체의 존립을 위한 가능조건 그 자체다.
물론 인권의 논리는 <잠재적으로는> 공동체 파괴적이다(아래의 논의는 참고: Wellmer 1993, 182)**17). 확실히 인권이 보장하는 것은 모든 개인이 공동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 공동체적 관계를 무시할 수 있다는 것, 말하자면 모든 개인이 자기만의 성에 스스로 고립되어도 좋다는 것이다. 인권은 분열의 권리이고 이탈의 권리이며 고립의 권리이기도 하다. 때문에 왈쩌가 지적하듯이 ‘주기적인 공동체주의적 교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교정의 결과는 다시 그런 인권 존중의 공동체적 문화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단지 인권 존중의 전제 위에서만 그 공동체주의적 교정도 정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공동체’는 ‘인권’이 문제삼고 있는 타인들과의 관계의 논리, 곧 최소한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방식으로는 관계 맺지 말자는 관계의 논리와는 다른 차원의 인간 상호간의 관계의 논리를 표현한다. 공동체의 논리는 단선적으로만 보면 ‘남이 아닌 우리’의 틀 안에서의 가족의 논리고 우정의 논리고 민족의 논리다. 이런 논리를 따르는 공동체적 관계가 낯선 ‘남’인 타인들과의 관계와 똑 같지 않으리라는 것은 명백하다***18). ‘공동체’는 단순히 개인들의 이익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하는 ‘결사(association)’와는 달리 질적으로 훨씬 강하고 깊은 개인들 간의 연결 형식을 의미한다(Buchannan 1998). 거기에는 ‘인권’보다는 훨씬 강한 개인들 사이의 연결 고리, 곧 ‘공동선’이나 ‘공동의 목적’이 있고 소극적인 ‘관용’과는 다른 차원에서 타인들에 대한 정서적이고 <적극적인> ‘배려’의 원리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법’(적 권리) 보다는 상호주관적 ‘신뢰’와 ‘덕성’이 더 우선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동체는 ‘인권’의 제도화를 넘어 서는 ‘연대성’의 논리에서만 제대로 포착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예컨대 이진우가 시도하는 것처럼 어떤 덕치주의적 공동체적 연대성의 논리로 인권의 논리를 대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여전히 연대성의 논리를 좇아야 할 경우에도 그것이 정당한 한계 안에 머물고자 한다면 인권이 언제나 전제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진우에 따르면, 우리가 유가적 공동체주의가 내면적으로 요청하고 있는 인간 존엄 사상을 종법 가부장제의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분리시켜 고찰하면, 우리는 그로부터 현대 사회의 맥락에서도 타당하고 심지어 서양 자유주의의 한계****19)도 극복할 수 있는 시민들 상호간의 신뢰의 토대를 찾아낼 수 있다(참고: 이진우 1999, 324 아래). 그가 주목하는 것은 유가적 전통의 ‘수신修身’의 요구에 함축되어 있는 공동체주의적 관용의 개념, 곧 ‘서恕’다. 이 ‘서’는 “다른 사람을 자기와 같이 대한다는 능동적 관용의 태도”(325)인데, 이런 태도에 바탕하는 공동체의 논리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 이해를 향한 <내면적> 동기에 의해 규제되기 때문에 공동체적 관계를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만들 수 있다(326): “유가적 공동체주의는〔…〕수신을 근본으로 삼음으로써 인간의 신체적 훼손과 사회관계에 의한 인격적 훼손을 막을 수 있는 관용의 유대 관계를 추구한다.”(328)
그러나 그가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는 장치로서 내세우는 이 관용의 유대관계는, 비록 그가 그것을 곳곳에서 ‘인권’과 대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지만, 민주주의적 법질서의 핵심으로서의 ‘인권’의 논리와는 명백히 다르고 심지어 그에 비해 큰 결함을 지니고 있다. ‘인권’은 단순히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인정이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인권’으로 보장한다는 것은 그 존엄성이 훼손되었을 경우 그 훼손을 고발하고 필요한 경우 강제적인 법적 제재를 통해 그 훼손을 보상할 수도 있다는 것을 함께 의미한다*****20). 이것은 다름 아니라 모호하고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그래서 그 만큼 깨지기도 쉬운 시민들의 ‘수신’을 통해 형성된 ‘관용의 유대관계’와 같은 관계가 지니는 사회통합 원리로서의 기능적 약점을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법의 논리를 통해 대체하는, 말하자면 근대의 역사적 성과다.
비록 예컨대 “다양한 욕구를 이성적으로 통제하는 개별적 존재로서 정의로운 사회관계의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이진우 1999, 329)하는 시민적 덕의 함양이 권장될 수 있고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그런 수신의 논리는 모든 타인의 인권에 대한 존중의 ‘의무’를 전제하고 타당한 법제정의 기초가 되는 ‘인권’과 같이 모든 사람들에게 강제될 수는 없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성원들의 수신에 기초한 신뢰의 연대성은 그 자체만으로는 또한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사회평화와 공동체적 조화의 이름으로 ‘수신’이 일방적인 시민의 ‘의무’로서 강요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권의 전제 위에서 공동체적 연대성은 약화되거나 부정된다기보다는 그 성원들의 자기실현의 질이라는 관점에서 좀 더 성숙하고 발전된 것으로 형태변화를 겪는다고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형성된 공동체적 연대성을 ‘민주적 연대성’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인권과 더불어 한 공동체는 비로소 온전하게 그 성원들에게 자발적인 참여와 창조의 기회를 부여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성원들이 사회적 삶의 연관을 <스스로>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공동체의 의미를 다름 아니라 그것이 그 구성원 개개인의 자기정체성의 형성에 대해 구성적이고 그래서 그것이 각 개인의 자기실현의 불가피한 상호주관적 전제로서 작동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면, 우리가 그 공동체를 단순히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비판적 선택>과 <기획>의 문제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개인들의 자기실현의 질과 관련하여 결정적인 의미를 지닐 것이다. ‘공동체적 연대성’의 논리가 인권의 논리를 수용한다는 것, ‘부정적 우리’의 저 편에서만 ‘우리’를 형성하겠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공동체적 삶의 양식이 지닌 <구성적 역사성>, 즉 단순히 과거 지향적이지만은 않은 역사성을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인권과 더불어 비로소 <의식적으로 가꿀 수 있고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나아가 한 공동체가 연대성을 추구하면서 인권을 존중한다는 것은 ‘연대성’의 참된 가치도 비로소 온전하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대성의 의미가 한 공동체의 성원들이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존중과 존엄성의 정도에서 찾아질 수 있다면, 인권과 더불어 연대성은 약화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질적으로 한층 심화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이제 모든 개개인은 단순히 인종, 언어, 성별, 지역, 종교, 능력, 계급 등과 같은 어떤 특정한 원초적 계기 때문에 존중받거나 존엄성을 누리거나 또는 그렇지 못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보편적 존중’의 대상이자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공동체 모든 성원들의 이해관계의 ‘평등한 존중’에 대한 요구는 어떤 공동체의 성원들이 지닌 모든 원초적 차이들과 그 각각의 차이들을 축으로 하는 전통적-배타적 연대성을 무시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요구다. 그러나 그 요구는 우리는 이제 ‘전라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 ‘양반’과 ‘상놈’, ‘남’과 ‘여’, ‘정상인’과 ‘장애인’ 따위의 차이를 넘어서 모두 진정한 한 <민주적 정치공동체>의 민주시민으로서 평등하게 존엄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또한 공동체의 모든 성원들의 보편적 존중에 대한 요구로서의 인권에 대한 요구는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는 가치공동체의 공동체적 연대성의 성격도 변화시킨다. 인권의 규범적 요구가 사회적으로 인정된 위에서는, 원칙적으로 모든 개인들은 자기가 속한 사회 안에서 사회적 평가의 기회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곧 모든 사회성원들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윤리적 가치지평의 근본적 개방화를 통해 자신의 능력과 특성에 대한 사회적 존중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예컨대 학력이나 직업 따위의 지표가 근본적인 위계를 낳는 방식으로 개인들에 대한 사회적 평가의 잣대가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래서 ‘청소부’의 직업과 ‘교수’의 직업 사이에 그 사회적 존중의 정도와 관련하여 위계적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소부’와 ‘교수’는 단지 서로 분업하며 협동하는 평등한 공동체의 성원들일 뿐이다.
그것은 곧 그 가치공동체가 그 구체주의적-특수주의적 성격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제 한 공동체의 연대성의 원리가 되는 가치지평은 그 성원들의 개별적 특수성의 원리적 무제한성을 포괄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다원적이고 개방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참고: Honneth 1993, 268 아래). 가치와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배려와 관용, 곧 가치 및 문화의 다원주의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연대성의 성격 자체를 이제 아주 최소한의 의미에서만 또는 어떤 ‘형식적인’ 것으로서만(참고: 호네트 1996, 278 아래)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제한 위에서 성립한 공동체적 연대성이라도, 얼핏 들지도 모를 우려와는 달리, 그 성원들이 서로에 대해 ‘수동적 관용’을 넘어서서 ‘적극적인 상호 배려’로 나아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사회적 유대의 끈을 여전히 가질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이 때의 연대성은 어떤 ‘시민의 덕’과 같은 것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 성원들이 그러한 연대성을 자기실현의 본질적 차원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러니까 이러한 연대성의 의식은 “공동의 삶”이 그 성원들 개개인에게 “전인적 인격의 충일”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가능하다(Dewey 1996, 128). 듀이는 그러한 연대성의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를 “위대한 공동체great community”라고 이름 붙였다.
이 연대성은 “모든 사람이 참여하고 모든 사람의 태도에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그런 결사체에서 결과된 의식적으로 평가된 가치들에 대한 다른 이름이다.”(같은 책, 130) 이 연대성은 단순히 내가 어떤 공동체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그 성원들과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전통을 공유하고 하는 따위의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의 삶이 다름 아니라 내 삶을 풍부하게 하고 발전하게 하기 때문에 그 함께 하는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가꾸는 것이 자발적인 내 삶의 일부이고 내 삶의 참 된 기쁨이 될 수 있는 그런 연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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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논문 요약문>
이 글은 우리의 유가전통의 배경 위에서 서구에서 진행되고 있는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의 공과를 수용하여 오늘날의 조건에서 유가 정치철학 전통의 비판적 계승과 서구 자유주의의 한계 극복이라는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고자 하는 ‘유가적 공동체주의’의 시도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 그 목적을 갖고 있다. 이 글은 ‘유가적 공동체주의’가 단지 서구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에 대한 어떤 거울상이 아니고자 한다면 공동체 발전의 내적 논리 자체가 ‘인권’과 같은 그 성원들 개개인의 이해관계의 특수성과 차이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를 불가피하게 요청하며 어떤 공동체도 단지 그러한 장치의 충분한 제도화라는 전제 위에서만 규범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런 인식의 수용은 ‘유가적 공동체주의’의 규범적 성격 변화를 강제하는 것일 것이며, 나아가 우리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유가적 공동체주의’를 모두 넘어 선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해야만 할 필연성을 보여주며, 우리의 전통에서 강조되어 왔던 공동체적 연대성의 계기는 공동체 자체의 자기발전 논리 때문에라도 아주 형식적일 수밖에 없는, 그러나 그러면서도 공동체적 결속을 가능하게 하는 ‘민주적 연대성’의 이념 아래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 논점이다.
주제 분류: 사회/정치철학, 윤리학
검색어: 인권, 자유주의, 공동체주의, 유가적 공동체주의, 공동체, 연대성
<Zusammenfassung>
Menschenrechte und demokratische Solidarität- Konfuzianistische Tradition und Liberalismus-Kommunitarismus Debatte
Das Ziel dieses Artikels besteht darin, mit dem sog. "konfuzianistischen Kommunitarismus" kritisch auseinanderzusetzen, der sich vor den Aufgaben gestellt sieht, unter den heutigen Bedingungen — im Hintergrund der "Liberalismus-Kommunitarismus Debatte" im Westen und der ostasiatisch-konfutzianistischen Tradition — den Versuch sowohl der kritisch-rettenden Aneignung der politisch-philosophischen Überlieferung des Konfuzianismus als auch der Überwindung der Grenzen des westlichen Liberalismus zu unternehmen. Ich möchte in diesem Artikel versuchen, zu zeigen, daß der "konfuzianistische Kommunitarismus", wenn er nicht lediglich das Spiegelbild des westlichen Liberalismus sein möchte, die Einsichten übernehmen können muß, daß die innere Entwicklungslogik der Gemeinschaft selbst, wie immer sie auch sein mag, das gesellschaftliche-politische System der Menschenrechten fordert, das es ermöglichen soll, Besonderheiten und Unterschiede der Interessen der einzelnen Mitglieder der Gemeinschaft zu schützen, und daher daß eine Gemeinschaft nur unter den Bedingungen der politischen Umsetzung solcher Forderung erst eine normativ legitime sein kann. Das Übernahme solcher Einsichten soll im unserem Kontext die unvermeidliche normative Charakterveränderung des "konfuzianistischen Kommunitarismus" heißen, die vor allem darin zu erkennen geben wird, die kommunitaritische Tradition unter der Idee einer "demokratischen Solidarität" zu subsumieren zu versuchen, die gerade wegen der Entwicklungslogik der Gemeinschaft nur "formal" sein muß, dennoch derer integrierende Kraft stark genug sein kann, um das erforderliche Band für eine Gemeinschaft herzustellen.
Stichwörter: Menschenrechte, Liberalismus, Konfuzianistischer Kommunitarismus, Gemeinschaft, Solidarität
<투고자 인적 사항>
논문제목: 인권과 민주적 연대성 - 유가전통과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
투고자: 장은주 (Eun-Joo Chang)
- 소속 : 영산대학교 교양학부
- 주소 : 경상남도 양산시 주남리 산 150
- 전화번호: 055 - 380 - 9325 ; 011 - 9019 - 4376